검은 암석 지대에서, 핸드폰도 없이 복잡한 계산을 하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굴러다니는 조그만 돌조각을 주워 분필마냥 바닥에 흠집을 내서 계산을 써 내려갔고, 그동안 머리카락과 옷은 바닷물이 마르며 찝찝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끔찍했다. “……여기가 게이트였고…표적 던전 브레이크 퍼센트가……아마…….” “……닌 이런 것도 할 줄 아나?” “조용히...
와, 비 오니까 좀 낫네. 슬리퍼에 맨발 상태로 송정 국밥집에 앉아 리금석과 리금철 형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학교에서 예능을 찍을 때, 리금석과 리금철은 다큐멘터리 인간극장을 찍고 있으니 예능 쪽인 내가 가끔 와서 웃겨 줘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은 가끔 기가 차도 웃음을 지어야 하는 동물이었다. “여.” “…와……거 꼴이……. 참…….” 리금철이 질색...
기말고사와 여름은 금방 다가왔다. 지구 온난화, 지구 온난화 하더니 기어코 봄이 삭제 되어버렸군…싶은 짧은 봄을 지나서 기말고사 시즌이 와버렸다. 하복을 입은 채로 학교 다니기란 생각보다 훨씬 더 불쾌한 일이었다. 나 학교 다닐 때에는 아직 교복 상의가 불편하고 짧은 블라우스라 이걸 입고 여름을 나면 기분이 개같았다. “으, 통풍 안 돼!” 그럼 결국 블라...
내가 서면에 아는 애를 만나러 간다고 하긴 했는데, 여기서 서예린을 만날 줄은 몰랐다. 왜냐면 서예린은 바깥에 나돌아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저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겠다…정도로만 집밖을 나가고, 학창 시절에도 내가 빌고 빌어서 겨우 서너 번 함께 나와 놀러다닌 게 전부였을 정도였다. 그 지독한 집순이…집돌이가 왜 스타벅스에?...
“윤혜야.” “엉?” 질겅질겅, 오징어 다리를 씹다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서예린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게 보였다. 3월까지만 해도 나보다 조금 작았던 서예린은 어느새 나보다 3센치 정도 더 커져 있었다. 스무 살이 넘으면 거의 머리 하나 정도 차이가 날 정도로 키 차이가 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는 얼추 거기서 거기로 보이는 키 차이였다. “왜?” “너 ...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들고서 화장실에 들어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조금 기다리자 곧 상대가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오빠 아니가?” 여인숙 할머니에게서 온 전화였지만 분명 리금철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순간,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맞…다.” “왜 전화 했는데?” 수업 시간이라 그런지 사방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오빠가 현관문 앞에 서 있어서 기겁했다. “으악, 깜짝이야!” “내가 더 놀랐다, 가시나야.” 그렇게 말하면서 표정 변화는 하나도 없는 게 호러다. 쿵쾅거리는 심장에, 가슴께를 두드리며 스리슬쩍 오빠의 눈치를 보았다. 대체 왜 현관문 앞에 서 있는 걸까? 찔리는 게 많은 나로서는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상황에 걸맞게 쭈그러드는 수밖에 없었...
식사 후, 나는 내 방에서 머리를 자르는 가위와 바리깡을 들고 나왔다. 오빠 머리나 내 머리나 모두 내가 자르기에, 집에 이 정도 도구는 있었다. “자! 앉아 봐라!” “…와, 하나도 폼이 안 나는데 꼭 이래야 하니?” “폼 나라고 비닐 두르는 줄 아나? 머리카락이 옷 안에 드가면 거슬친다 아이가.” 억지로 리금석부터 의자에 앉히고, 먼저 가위로 길이를 다...
리금석은 낯설었으나 이제는 익숙해진 에미나이를 바라보았다. ‘아차, 에미나이라고 생각을 하믄 말하다가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오겄다야.’ 도윤혜. 대부분 느슨하게 풀린 웃는 얼굴을 한 도윤혜의 겉모습은 특별하게 예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에게 안도감을 주는 호감형이었고, 미소를 지을 때면 반짝이는 느낌이 있었다. 길게 기른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도윤혜는...
주말이 다시 돌아왔다. “제발 무슨 일 생기면 오빠 불러라. 알겠나?” “응응, 알겠다.” 이렇게 믿음직스러운 나인데도, 오빠는 불과 일주일 전에 일어난 일 때문인지 전혀 믿지 못한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힘겹게 출근했다. 오빠가 출근하고 얼마 안 되어, 점심 때. “여봐라, 윤혜야. 다리는 어떠니?” 리금석이 왔다. “완전 별로. 모의고사 때 한 번 ...
평일의 일상 속에서 주말에 있었던 비일상의 공포는 점점 농도가 옅어졌다. 몸이 덜덜 떨리고, 눈물이 펑펑 쏟아질 정도로 두려웠고 무서웠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안심이 된다. 과거가 바뀐다는 건, 미래도 바꿀 수 있다는 소리! ‘그러니까 리금석네 형도 살 수 있고, 나도 살 수 있는…뭐 그런 미래로 만들겠단 소리지.’ 나는 왜 이렇게 천재인 걸까? 지금 ...
일요일. 연신 걱정하는 오빠를 아르바이트 출근 시키러 보내고, 리금석을 기다렸다. 약속했던 시간대로 오나, 했더니 한참을 늦었다. “열두 시 반에 오라니까 왜 한 시 반에 오고 난린데!” “아니…이거이……내 시계는 지금이 열두 시 반인데…….” 나는 리금석의 등짝을 두들겨 패며 성질을 부렸다. 음식이 식은 건 둘째 치고 한 시간 동안 어제 그랬던 것처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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